지명/유래/전설전체 37건 중 15개 (1/3페이지)2024-03-29T19:55:50+09:00http://www.seonbawi.co.kr/contents/rss_www_logo.pngurn:uuid:24909bb4-c7cd-2aae-061f-74c190c76529금학리(琴鶴里)urn:uuid:63e8df8c-b237-99af-6c74-d524d7615e642017-01-24T20:54:32+09:00관리자안동군 임동면의 대곡리와 사이를 하고 있으며 흰 소나무 곧 백송이 자생하고 있다. 비교 적으로 교통이 불편하고 지대가 높아서 가물 때에는 물이 모자라기도 한다. 본래 영양군 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금대동고 학산동을 합하여 금 학리라고 부르게 된다. 금대(琴大)와 학산(鶴山)의 이름을 따다가 합하여 지은 이름이다.가정기(柯亭基)urn:uuid:9e99cabc-16d4-1683-ddaa-f00b6939cf112017-01-24T20:54:13+09:00관리자점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동네에 있는 정자나무가 가죽나무라 하여 가정기라 하였다 한다. 가정기는 장가정기와 옛가정기로 나우어진다(남만술(51) 제보). 이와 같이 나무 이름 을 따서 정자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많이 있으나 이르자면 느티나무 괴를 쓰는 괴정(槐亭) 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.곰지기ㆍ웅지(熊地)urn:uuid:e2924027-dfda-b797-a6d9-f041fd91fb5a2017-01-24T20:54:00+09:00관리자대뜨무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이 곳에 곰이 서식했다는 말도 있고 산의 형상이 곰같이 생겼다고도 하여 곰지기라 부르게 되었다(이병일(46) 제보). 『신증동국여지 승람』의 경우 곰 웅(熊)자가 들어 가는 마을의 이름이 전국에 약 40여 군데나 나온다. 예로 부터 곰은 단순하게 짐승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조상신 혹은 영혼이라는 토템의 뜻으로 쓰였으니 고조선의 단군설화가 그 대표적이라고 할 것이다. 곰을 적을 한자가 없다. 하여서 그와 비슷한 소리를 지닌 한자를 썼기에 곰-검-감-금과 같은 한자가 쓰이었다고 생각한다.금대(琴臺ㆍ琴擡)ㆍ금대동(琴臺洞)urn:uuid:9c6ed419-779e-fd77-dd32-917f892d24392017-01-24T20:53:45+09:00관리자금학리(琴鶴里)에서 제일 큰 마을이며 약 500년 전 금씨(琴氏)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금대(琴臺) 또는 금대(琴擡)로 불렀다(우수암(63) 제보). 앞에서도 풀이 하였지만 곰을 숭배하는 신앙이 농경생활로 넘어 오면서 물신과 땅신으로 섬김의 대상 이 달라진다. 하면 여기 금대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. 어쩌면 금대는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나오는 땅 이름으로서 물신 혹은 땅신을 모시기 위한 단이나 당이 있었음을 가늠하게 해 준다. 땅 이름의 분포로 보아서 금-검 계열의 땅 이름을 거의가 북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이 있다.댓드무ㆍ대뜨무ㆍ대등기(大登基)urn:uuid:9643d596-8065-e27d-0c85-236deb401bee2017-01-24T20:53:31+09:00관리자금대 북서쪽 등성이에 있는 마을로 본동에서 산뒤쪽으로 높이 올라간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대등기라 불렀다 한다(천도선(60) 제보)미누실ㆍ면우실(眠牛室)urn:uuid:dfcb5987-04fa-f116-b1a5-4ca15d58a23a2017-01-24T20:53:18+09:00관리자양지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산의 형상이 소가 잠자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면우실이라 하였다(남용섭(38) 제보). 면우의 소리가 바뀌어 며누로, 다시 단모음이 되어 미누로 된다. 이 소리가 궅어져서 미누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.양지(陽地)urn:uuid:39b566b5-1231-f69d-779e-d013f5360ef32017-01-24T20:53:03+09:00관리자금대마을이 차츰 번성하여 양지쪽으로 조그마한 마을이 생겼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(김 순석(68) 제보). 금대의 금(琴)은 땅 이름의 분포로 보아서 거의 북쪽을 가리킨다. 하면 뒤 에 산이 바람을 막아 주고 앞에는 내가 흘러 돌아 이른바 양지를 이루게 되니 양지마을의 뿌리는 금대 마을이라고 하겠다.옛가정기ㆍ바른골urn:uuid:499f6781-4958-2778-bbd7-97f6680aefd12017-01-24T20:44:47+09:00관리자점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가정기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다. 가정기의 원래 마을이 된 다 하여 옛가정기라 했다 한다(김오한(34) 제보).새못ㆍ음지(陰地)urn:uuid:a209461f-b073-1122-3efa-c18052d4a1442017-01-24T20:44:32+09:00관리자양지 마을이 점차 번성하여 금대의 응달쪽에 새로 마을이 들어섰으므로 음지 또는 새못 으로 부르게 되었다(김수진(65) 제보). 음지는 거의가 산의 북쪽을 이르는 일이 많은 것으 로 미루어 보면 여기도 양지의 정 반대 되는 산의 북쪽의 자리에 있어 생겨난 마을이라고 본다.잿곰지기urn:uuid:49a09395-18e6-0ff9-e897-e1891113b84b2017-01-24T20:44:14+09:00관리자곰지기에서 서쪽 방향으로 약 1.5 킬로 위에 산등성이에 위치한 마을로 산세가 수려하고 새와 짐승이 많이 깃들여 산다. 곰지기 마을의 위쪽 재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(이 상섭(52) 제보).점마ㆍ점촌(店村)urn:uuid:d8c57b84-7445-b62c-b048-4d56a5181dbc2017-01-24T20:43:59+09:00관리자금대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. 조선 시대 쟁기를 만들어 팔던 유기점(鍮器店)이 있었던 곳이어서 점촌이라 불렀다. 점촌을 지나 대등기를 지나는 길이 옛날 안동을 잇는 길이었다 (이차형(34) 제보).학산(鶴山)ㆍ학산동(鶴山洞)urn:uuid:5468c455-b4b6-252f-130b-d7f00a1e50d32017-01-24T20:43:27+09:00관리자금대 남동쪽에서 있는 마을이다. 앞산인 무학(舞鶴)이 춤을 추는 형국인데 묘를 썼다가 학 이 날아간 곳이라 하여 학산이라 이름지었다(이상섭(52) 제보).대천리(大泉里)urn:uuid:3ed03a4e-9e9b-53d5-5632-325ae66cc6022017-01-24T20:42:56+09:00관리자안동시 임동면(臨東面) 갈전리 지리실골과 영양군 입암면 대천리 서편 한골재와 군의 경 계를 이루고 있다. 옛 적 길이 불편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무리를 지어 숲이 우거진 산길을 가슴을 조이며 다녔다고 한다.
본래 영양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대거리 · 자암리 · 천곡리 · 늑구리를 합하여 대천리라 불러 입암면에 들게 한다. 대거(大巨)와 천곡(泉谷)의 이름을 따 라 붙인 마을의 이름이다.구레두들ㆍ늑구(勒邱)urn:uuid:087d86d6-748e-7311-7ca5-cbe11344e75b2017-01-24T20:42:40+09:00관리자산막골 서쪽 둔덕에 있는 마을이다. 뒷산이 천마가 굴레를 벗어 놓은 모양처럼 생겼다 하 여 늑구라 칭하게 되었다. 1800년 무렵 영양 천씨(英陽千氏)가 처음으로 들어 와 정착하였 으며 통정대부(通政大夫) 천상유(千尙裕) 선생의 활약으로 동네가 조정에 소개되기도 하였 다(권원근(64) 제보). 늑구는 구레두들을 한자로 뒤쳐 적은 것이다.댓거리ㆍ대거리(大巨里)urn:uuid:63dca196-6924-2fdc-4c5b-fddaea4c3eb22017-01-24T20:42:25+09:00관리자신사리의 사래 및 금학ㆍ샘실 등으로 통화는 세 갈래 길의 중심지로서 대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. 약 300년 전 이 마을을 개척했다. 금학과 대천 양계곡의 물이 합수하여 큰 개 울을 만들었다 하여 대거리라 부르게 되었다(여목이(80) 제보).